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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를열받게 하는것들. 안. 도현

명철이2 2023. 8. 30. 14:20


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은,
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
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
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
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
전교조 탈퇴 확인란에
내 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
미국이나 통일문제가
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
아주 사소한 것들
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은,

이를테면,
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,
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?
이 한마디에 그만
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
홀작 거리는데
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
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,
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
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,
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
미동도 하지 않을 때
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 받는 것이다

밥 먹을 때,
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
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
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 받지만
어떤 날은 반찬 가지 수는 많은데
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 받는다
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 투정하느냐고
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 받고
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
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
나는 아침부터 열 받는다
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 받는 것을
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
나 자신한테 열 받는다
죽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
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
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

헌데
열 받는 일이 있어도
요즘 사람들은 잘 열 받지 않는다
열 받아도 열 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
요즘은 그것이 또한
나를 무진장 열 받게 하는 것이다