2023/09 28

가을 그리움. 이. 원문

하늘은 그대로 옛 하늘이것만 잃어버린 산과 들 다 어디 갔나 놀던 곳 다녔던 곳 우리 엄마 목화밭 참새 떼의 그 고향 다 어디 갔나 하늘 높이 새털 구름 더 높이 흩어지면 가을바람 불어와 수수잎 노래 하고 높고 낮은 기러기 울음 서산 넘어 멀어지면 메뚜기 꾸러미 손에 들고 논길 따라 뛰어 왔지 그리워라 동무의 얼굴 검둥 개 마중의 길 뒷산 길 큰 밤나무 주머니 가득 알암 떨어지네

카테고리 없음 2023.09.30

아름다운천. 박. 재삼

나는 그대에게 가슴 뿌듯하게 사랑을 못 쏟고 그저 심약한, 부끄러운 먼 빛으로만 그리워하는 그 짓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죽을 때까지 가리라고 봅니다 그런 엉터리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남들은 웃겠지만 나는 그런 짝사랑을 보배로이 가졌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짠 아름다운 천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 이 가을 갈대 소리가 되어 서걱입니다 가다가는 기러기 울음을 하늘에 흘리고 맙니다 *

카테고리 없음 2023.09.26

가구의힘. 박. 형준

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 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,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..

카테고리 없음 2023.09.22

가을끝. 나. 해철

자정 넘어 든 잠자리에서 바라보는 창문에 나무 그림자가 서렸다 가을은 너무 깊어 이미 겨울인데 저 나무를 비추고 서 있는 등불은 얼마나 춥고 외로울까 갑자기 어려져서 철없이 하는 말을 듣고 옆에 누운 사람이 하는 말 그럼 나가서 그 등불이나 껴안아주구려 핀잔을 준다 그래 정말 막막한 이 밤 등불의 친구나 될까보다 괜스레 마음은 길 위에 있다

카테고리 없음 2023.09.20

가을에는. 최. 영미

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,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,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,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,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

카테고리 없음 2023.09.19